본문으로 바로가기 대메뉴로 바로가기
서브비주얼
  • 알림마당
  • 보도자료 및 언론보도

보도자료 및 언론보도

보도자료 및 언론보도
[언론보도] 달성 도동서원, 전국최초 사액 봉헌 재현-세계문화유산 잠정목록 등재 `서원문화` 우수성 알린다[경북매일]
작성일
2013-09-05 11:40:18
작성자
달성문화재단
조회
1842
▲ 도동서원 전경

“도동서원(道東書院), 도(道)가 동(東)쪽으로 왔다.”

동방오현(東方五賢) 중 수현(首賢) 한훤당(寒暄堂) 김굉필 선생을 배향(背向)하는 도동서원(사적 제488호, 보물 제350호)에서 전국 최초로 사액봉헌(賜額奉獻) 재현 행사를 통해 조선시대 서원문화의 우수성을 알리고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기원하는 `도동서원제 도(道) 동(東)에서 꽃피다`가 열린다.

달성문화재단(이사장 김문오 달성군수)은 오는 7일 `道(도), 東(동)에서 꽃피다`라는 주제로 전국 최초 서원 사액 봉헌을 재현한다.

조선시대 조정에서 사액을 봉송하는 행렬과 경상감영에서 조정의 봉안사 일행을 맞이하는 의식인 지영례(祗迎禮)를 시작으로 사액 행렬 퍼레이드와 도동서원에서 봉안례(奉安禮)로 이어지는 이번 행사는 유네스코 세계유산 잠정목록으로 등재된 도동서원의 가치와 유교사상을 조명하기 위한 것으로 700여 명의 시민이 참여한다.

부대행사로는 전국 최초로 달성군의 95개 법정동의 각 마을 깃발을 제작한 충효깃발제가 열리며 서원 스토리텔링전, 도동서원 스탬프 투어, 유생체험 등이 다채롭게 열릴 예정이다.



봉안사 일행맞이 지영례 시작으로 사액 행렬 퍼레이드·봉안례 이어져
충효깃발제·스토리텔링전·유생체험·스탬프투어 등 부대행사도 다채



□ 서원 사액의 의미와 도동서원

조선시대 서원은 정치·사회·교육·문화사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사액은 단순히 현판과 함께 노비와 서적 약간을 지급하는 정도의 의미만 가진 것이 아니라 서원에 대한 국가적 공인이며, 사람들의 활동에 대한 보장책이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은 영주의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으로 풍기군수로 부임한 퇴계(退溪) 이황의 청원(請願)에 의해 1549년(명종 4년)에 `소수서원`으로 사액됐다. 퇴계는 사액을 요청하며 감사와 수령이 서원에 대해 경제적인 지원만 힘쓰고 학칙의 구속과 교과의 내용, 서원의 운영 등에 대해서는 간섭을 하지 않도록 요청했다. 향교와 달리 향촌의 사람들이 자치적으로 서원을 관리, 운영할 것을 강조한 것이다. 조정에서 사액을 하사한 것은 쇠퇴한 관학의 부진을 대처하고 관학 복구에 따른 경비를 줄일 수 있다는 이점과 지방사림을 통제하고 순화하는데 효과적이었기 때문이다.

백운동서원이 사액 이후 위상이 높아지자 사림들이 서원 설립과 운영에 적극 참여하게 됐고 기존의 유향소와 사마소와 같이 사림의 집결소이자 향촌사회의 중심기구로서 서원이 역할을 담당하게 됐다. 이후 사액 서원은 사림계열이 주도권을 잡게 되는 선조대에 들어서며 제향인도 고려조 인물에서 벗어나 사화기의 인물을 포함해 성리학의 정통성을 내세웠던 김굉필, 조광조, 이언적, 이황 등으로 확대됐다.

그러나 광해군 대의 북인정권이 등장하며 서원 설립과 사액이 정치적인 목적에 의해 좌우되는 계기가 됐다. 북인정권은 당시 퇴계·율곡파에 비해 상대적 열세인 학문적인 기반과 자파 보호 및 확대를 위해 서원 설립과 사액에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경우가 많았다. 인조반정 이후 서인과 남인이 세력을 다투면서 우세한 계열에 서원설립과 사액이 편향되는 양상을 보였고 이로 인해 서원은 당파적인 색채를 띠게 됐다. 도동서원은 영남을 대표하는 수원(首院)중 하나로 쌍계서원(雙溪書院)이 시초로 1573년 사액을 받았으나 임진왜란 당시 소실됐다가 17세기초 김굉필 무덤 아래로 옮겨 중건되면서 재사액이 됐다. 도동사원은 중건 당시 사림의 공론에 의하여 한훤당의 내·외손 및 일향 사림의 공동협력에 의해 중건됐다. 그 과정에서 한훤당의 외 증손인 정구는 중건 초기 서원 터를 고르는데 노심했고 현풍사림은 감사에게 중건에 필요한 물자의 적극적인 지원을 호소했다.

도동서원의 청액(請額) 과정은 구체적인 자료가 없으나 당대에 영남학파를 영도하는 한강 정구가 생존하고 있어 그를 중심으로 공론을 모아 관찰사에게 사액을 요청하였을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 이에 감사가 장계를 올렸고 1609년 광해군 1년에 임금의 윤허(允許)를 받았다. 그러나 당시 왕명으로 `도동서원`으로 사액이 되었으나 1년이 지나도록 현판이 내려오지 않았다. 이 때문에 현판식과 치제(致祭)가 이뤄지지 않아 봉안식이 연기됐다.

광해군이 집권한 후에도 현풍 사림의 기대와는 달리 곧바로 현판과 치제가 이뤄지지 않았다. 이에 한강은 이미 사액의 명이 내려진 상태에서 서원을 더 이상 비워둘 수 없어 감사에 장계(狀啓)를 요청했고 1609년 8월에 윤허, 지방 사림이 자체적으로 봉안식을 설행할 근거를 마련한 뒤 지방에서 현판을 제작하고 작성된 제문(한강이 지은 봉안문)에 윤허받는 식을 적용해 치제문으로 사용, 1610년에 이르러서야 위패를 봉안해 온전하게 서원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게 됐다.

▲ 도동서원 내부
▲ 도동서원 내부


□ 도동서원 사액 재현과 유교사상

달성문화재단은 오는 7일 도동서원 사액 봉헌 행사를 통해 사라져가는 전통문화를 현대적 의미로 재조명하고 이를 통해 달성지역의 새로운 문화·관광 콘텐츠로 활용할 계획이다.

특히 사액 과정과 그에 따른 치제는 흥선대원군 서원철폐령 후 단절된 상태이며 아직까지 사액 의례를 재구성하려는 시도는 이뤄지지 않고 있다. 따라서 도동서원의 사액 의례 복원은 다른 지역의 서원에서 시도되지 못한 중요한 콘텐츠의 선점이라는 의미는 물론 전국적으로 첫 시도이며 하나의 전형이 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또 도동서원을 비롯, 우리나라 9개 서원이 세계문화유산 잠정목록에 등재돼 이번 도동서원 사액의례 재현은 우리나라 문화유산의 위상을 높이고 서원의 가치 재조명과 활발한 학술활동도 이뤄질 것으로 전망된다.

사액 봉행 행사는 오는 9월7일 조정에서 내려온 사액 봉안사 예관 행렬을 경상감영에서 영접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나장 2인으로 구성된 인로군이 선두에서 서서 길을 인도하고 그 뒤로 영기(令旗) 1쌍과 부월(斧鉞) 1쌍을 든 의장대, 향축(香祝)을 실은 용정자(龍亭子)와 서적과 현판을 실은 채여(彩轝) 뒤로 예관과 서리 및 기타 인원이 배종(背腫)하는 43명의 봉안사 행렬이 도착하면 경상감사 일행 67명과 취타대 30명, 유림 및 지역 주민들이 맞이하고 이어 종로초등학교에서 출발해 경상감영까지 나팔과 필율, 태평소 등 풍악을 울리며 퍼레이드를 벌이고 경상감영에 도착하며 감사 이하는 허리를 굽혀 공손히 맞이한다.

이어 향촉과 액판이 전정(前庭)에 들어서면 제례악이 연주되는 가운데 67명의 관원이 일자로 서서 지영의 예를 행하고 감사는 사배의 예를 행한 뒤 선화정에 임시 봉안한다. 사액 지영례가 끝나면 달성군민체육관에서 포산고등학교까지 봉안사 행렬 100명과 경상감영 행렬 90명, 취타대 30명, 풍물패 30명, 유림, 95개 법정동을 알리는 깃발을 든 달성군 주민들로 구성된 사액 행렬 퍼레이드가 펼쳐진다.

사액 행렬이 도동서원에 도착하면 사액 봉안례가 재현된다. 유생이 액판과 향촉을 들고 서원에 들어가 중정당에 봉안하는 영액례에 이어 집례가 큰소리로 창을 하면 제생은 동서로 나누어 서서 차례로 북쪽을 향해 사배한 후 사액현판을 거는 게액례, 위패를 봉안하는 봉안례, 사은례, 축하무와 주제공연으로 사액봉헌 행사가 마무리된다.

달성문화재단은 이번 사액봉행 재현을 달성군 지역의 유구한 문화적 기반인 조선시대 사대부 가문과 유교문화유산 등 향토사 교육자료로 활용하고 이를 통해 지역민의 문화적 자긍심을 고취시키고 사액 의례를 도동서원 내 유물전시관, 관공서 로비, 문화원 및 교육기관에 디오라마 등 유형의 형태로 전시해 교육과 연구자료로 활용할 계획이다.

/이곤영기자 lgy1964@kbmaeil.com

현재페이지의 내용과 사용편의성에 만족하십니까?

사용편의성 만족도